같이 사는 유나보람 3
심보람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더 확실하지만
최근에 좋아한다고 확신한 것 중 하나라면
집에 있을 때 정유나 맨얼굴 보는 것
화장 다 지우고 잔뜩 힘 준 머리도 샴푸에 씻겨나가면
밖에선 초치는 소리만 해도 속내는 그게 아닌 걸 말해주듯
순한 얼굴을 뜯어보는게 좋아서 한번은 졸려 죽겠는데
야근하고 온 정유나 다 씻고 나올 때까지 기다린 적도 있음
저 싸가지를 내가 뭐 이쁘다고 과자랑 같이 씹다가도
잠깐만 보송해진 얼굴 마주하면 맘이 눈 녹듯 해서
나는 정유나 진짜 좋아하는구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는데
그걸 정의하고 나니까 정유나가 자기 앞에서 보였던
일련의 표정이나 행동들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거야
하지만 감정이라는게 숫자처럼 딱 떨어질 리 없는데다
심보람 딱히 연애 관련해서 깊게 생각해본 적 없어서
여러가지 가설을 세워도 통제 불가능한 변수만 넘쳐나고
누구한테 털어놓을 수도 없으니 그저 사무실에서
이면지에 계산식 끄적이다가 구겨 버리기를 여러 날
정유나랑 같이 살게 된 이후로는 람보 서재로 쓰는 방에 데려다놔서
하루 두 번 출퇴근할때 밥주면서 꼭 한두마디씩 말걸고
다 먹을때까지 기다렸다가 거실로 나오는게 또다른 낙인 심보람인데
요새는 람보야… 하다가 정유나가 부르는 소리에 나오는 일이 더 많아지던 중
그날도 밥먹는 람보 물끄러미 쳐다보다 출근해서는
갑자기 회식 잡혀서 황 부장 썁썁이 욕하고 있으니까
자기도 회식이라며 이따 연락하겠다는 정유나
대리 되고 나니까 이자영이나 정유나 아닌 다른 직원들이랑
커피 마시면서 잡담하거나 부서 회식에 참석해야 할 일이 부쩍 늘었는데
그동안은 기껏해야 회사 욕 한바탕 하는게 전부였던 심보람
열에 여덟은 대화 주제가 연애 결혼 육아인 무리들 속에서
조용히 먹기만 하고 있는데 꼭 한 명쯤은 심보람한테
미스 심은 만나는 사람 없댔나 더 늦으면 애 낳기도 힘들다
이런 소리 해서 억지 웃음 짓다가 삐삐 와서 잠깐 자리 비울라치면
뭐야~ 보람씨 남자친구 있었어? 하고 왁자지껄 떠드는 거
아니라고 손사래 치고 간신히 빠져나와서 가게 옆 공중전화로
음성메시지 확인했더니 정유나가 언제 끝나냐고 남겨놨길래
람보 핑계대고 짐 챙겨서 거의 쏟아지다시피 밖으로 나온 심보람
생각해보니 어디인지는 얘기 안했던 거 같아서
자기도 삐삐를 남겨야 하나 아니면 그냥 집에 가는게 맞나
회식장소에서 몇 발짝 못 벗어난 채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깨에 기다란 팔 하나 얹어지더니
코에 진한 술냄새에 희미하게 익숙한 향이 한 데 섞여 들어오는 거
고개 돌려보면 타이밍 좋았네 하고 씩 웃는 정유나
마케팅부는 술을 궤짝으로 마신다더니
상사들한테 받아 마신 술보다 정유나한테서 나는 술냄새에
더 취할 것 같은 심보람 약간 심통이 난 목소리로
대체 얼마나 마신거냐니까 자기 냄새 많이 나냐고
미안하다며 떨어지려는데 비틀거리는 정유나에 놀래서
그런거 아니라고 곧장 허리 감싸안음
부축한다고 해도 정유나가 훨씬 키 크니까
이리저리 같이 흔들리면서 간신히 지하철 역으로 내려오면
시간이 시간인지라 사람 별로 없는 역사 내 의자에
나란히 앉아 한숨 돌리면서 지하철 기다리는 두 사람
서늘한 공기에 말없이 숨만 고르고 있으려니
어쩐지 어색하고 착 가라앉아버린 분위기에
심보람 발 끝으로 바닥 쿡쿡 찍다가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고
사람들이 너 연락 받고 나가니까 남자친구냐고 그러더라
그 말에 정유나 갑자기 술 다 깨버린 기분
심보람은 계속해서 다들 되게 할일없나봐
매번 남자친구 없냐 결혼 안하냐 물어본다고 조잘거리는데
아무 대꾸도 없어서 이상한 낌새 느끼고 고개 돌리면
정유나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자길 보고 있어서
유나야…? 하고 이름 부르면 그제서야 평소 얼굴로 돌아와서
소개나 시켜주면서 그런 얘기 하라고 해
한 소리 툭 내뱉고는 다시 입 꾹 다물어 버림.
묘하게 지하철 타고서도 그대로 분위기가 이어져서
한 마디도 안 한 채로 집까지 들어 온 두 사람
심보람한테 먼저 씻으라 하니까 나 람보 밥 좀 하고는
서재로 가는 뒷모습 보며 작게 한숨 쉬고 코트 벗는 정유나
심보람 람보가 밥먹는 거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현듯 비장한 얼굴 하고 거실로 나오는 거 보고
왜 그러냐니까 유나 너 먼저 씻고 나오라고
정유나 어리둥절한데 일단 알겠다고 하고 욕실 들어감
너 자면 안된다 씻고 자야돼 잔소리 하는 것도 잊지 않고
심보람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졸기는 커녕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다가 마침내 씻고 나오는
정유나 보고 용수철마냥 소파에서 튀어오르더니
바톤 터치하듯 후다닥 욕실 향하면서 너도 자면 안된다고
기다리라는 말에 알겠다고 고개 주억거리고는
머리 말리면서 멀뚱히 앉아있던 정유나
긴장이 풀려서인지 금세 노곤해져서
눈꺼풀 느릿느릿 깜빡거리다가 안되겠다 싶어
티비 켜서 채널 돌려보지만 이 시간에 방영하는 건
심야토론 프로그램 뿐이긴 한데 아쉬운 대로
볼륨 제일 작게 하고 양복쟁이 아저씨들 떠드는 거 지켜봄
한편 심보람 다 씻었는데 여분 수건 없어서 문만 살짝 열고
유나야 나 수건 하나만 가져다 줄 수 있어? 하면 정유나 일어나서
수건 갖다주면서 너 이러려고 나한테 깨어있으라고 한거지
장난스레 말하면 아니라고 흘겨보는 심보람 얼굴에
가져 온 수건 덮어버리더니 머리카락 물기 털어주는 정유나
욕실 수증기랑 같이 조금 풀어져버린 분위기나
자기가 하루 끝에 그토록 보고싶던 말끔한 얼굴
그리고 다정한 손길에 잠시 젖어있다가
가까스로 정신 차린 심보람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반드시 왜 정유나가 가끔 자기를
아까처럼 그렇게 슬프게 바라봤는지 정의해야겠다고
고민해봤자 100퍼센트인 보기가 없는 문제란 걸 아니까
다만 자신이 최대한 보수적으로 봤음에도 나온 이 답이
정유나에게도 부디 정답이길 바라면서
정유나.
응?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어? 아, 알지.
… 알긴 뭘 알아, 진짜 아는 거 맞아?
어?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는데 일순간 조용해졌길래
그새 잠든건가 싶더니 비교적 또렷한 목소리로
운 떼는 심보람에 놀란 것도 잠시
연달아 토해내듯 갑작스레 꽤 커진 목소리로
말하는 모양새가 자기를 힐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눈을 마주쳐보지만 잔뜩 화나서 씩씩거리는 얼굴만 들어차니
슬며시 시선 피해버리는 정유나… 이 상황을 어떡해야 하나 싶어
머리카락 쥐어뜯고 싶은 심정인거 대신해서
애꿎은 옷자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정유나의 그 하얗고 긴 손가락 쪽으로 시선 옮겨서
빤히 노려보다가 이윽고 한 마디 더 하는 심보람
그럼 너는?
어?
너는 어떤데?
정유나 일단 자기가 대답해야만 이 상황이 종료되는 거
그리고 그 대답 아주 잘해야 하는 건 알겠는데
얘가 무슨 의미로 이러는건지 전부 확신이 서는게 아니라서
고장난 카세트 테이프마냥 어… 하고 의미없는 목소리만 늘어뜨리다가
다시 심보람 쪽으로 시선 돌렸더니 어느새 목까지 빨개져서
가늘게 떨고 있는 모습에 주저하던 답에 확신을 가져보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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